보 기(Bogey)

보 기(Bogey)

나 신입캐디...
캐비닛 배정받았는데 이상한 일기장이 놓여있다...
살짝 읽어봐도 아무도 모르겠지?

오른쪽 티를 눌러 몰래 보기

첫 번째 일기

슈퍼루키캐디 등 장 ψ(`∇´)ψ
오늘 굿샷골프장에 입사했다! 앞으로 두 달 동안 캐디 선배님께 교육을 받고 근무에 투입될 거라고 한다. 지금은 골프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기왕 시작한 거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야지.

두 번째 일기

신입 캐디 교육 끝
두 달간의 교육이 끝났다. 휴. 겨울에 골프장이 이렇게 추운 줄 몰랐다; 교육 기간에는 따로 수입이 없어서 선배님이 밥과 술을 계속 사주셨다.ㅠㅠ 매일 연습 하면서 죽자 사자 업무를 익혔는데 실전에서 무사히 잘할 수 있을까? 내일부터는 선배님을 따라
동반 근무 동반 근무

선배 캐디가 근무할 때 따라 나가서 캐디 업무를 배우는 것으로 캐디 교육의 마지막 과정이다.
에 투입되는데 으 긴장된다!

세 번째 일기

골프를 치러 온 건지 꿀빠러 온 건지?
교육생 동반 근무에 나가고 있다. 듣던 대로 이론과 실전은 천지 차이였다. 선배님 없이 이 모든 걸 혼자서 해야 한다면 정말 멘붕일 듯. 그래도 이제 빨리
티켓 티켓

담당 캐디명, 고객명, 경기 시작 시간 등이 인쇄된 종이로 ‘배치표’라고도 한다. 즉, ‘티켓 받는다’는 표현은 라운드에 투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받아서 나도 돈 벌어야지!! 그동안 챙겨주신 선배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다.

세 번째 일기

골프를 치러 온 건지 꿀빠러 온 건지?
그런데 재밌는 게, 사람들은 왜 스포츠를 하면서 꼼수를 부리지?? 한번은 공이 카트 도로에 떨어져 도로를 타고 굴러갔는데, 사람들이
도로공사 협찬 도로공사 협찬

공이 카트 도로에 맞고 그린 방향으로 굴러가는 상황. 마치 도로공사에서 길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행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라며 좋아했다. 선배님도 웃고 계시길래 그게 무슨 말인지 여쭤보니 공이 도로로 굴러간 덕분에 실제로 친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간 거라고 한다. 그러면 골퍼는
타수 타수

골프는 규정 타수인 72타를 기준으로 타수를 줄일수록 이기는 게임이다.
를 줄일 수 있어서 좋고 캐디는 진행이 빨라져서 좋다고.. 사람들이 그런 요행을 바라고 신나 하는게 웃기다ㅋ

네 번째 일기

하루에 두 탕은 힘드렁
처음에는


하루에 2라운드 근무하는 것. 1라운드는 정규홀을 기준으로 약 4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해서 돈 많이 벌 생각만 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손님 상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데다 팀마다 스타일도 다 다르니.. 근무 나갈 때마다 손님이 낯설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다. 이제껏 주변에서 보던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서 더 그런 것 같다. 선배 언니들은 요령 있게 잘하던데... 게다가 나는 아직 업무가 능숙하지 않아서 툭하면 컴플레인을 받는다.ㅠ 여러모로 빡센 일이라는 걸 체감하고 있다.

네 번째 일기

하루에 두 탕은 힘드렁
그래도 투 많이 하면 다른 알바에 비해 수입은 괜찮다. 매일 푸른 산과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좋고, 다른 캐디 언니들이랑도 친해지고 있으니까 뭐… 언니들 말로는 처음 1년이 제일 어렵고 3년 지나면 할 만해 진다고 하더라.

다섯 번째 일기

건실한 캐디로 인정받은 날
처음 필드장에서 일하는 사람 치고는 오래 일한다며 선배님께 칭찬을 들었다. 사실 캐디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많이 알지만 정작 무슨 일은 하는지는 잘 모른다. 서비스업이다보니 누군가는 되게 고생 많이 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하는일 없이 꿀빤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섯 번째 일기

그만 좀 땅 파먹어..(;′⌒`)
날도 점점 더워지는데
배토 배토

디봇(Divot)을 모래로 메워주는 것. 디봇(Divot)은 골프 클럽에 맞아 잔디가 뜯겨 나가며 땅이 패인 곳을 말한다.
업무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 캐디는 선수를 보조하고 경기를 진행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골프장 코스 관리까지 캐디의 업무라니!? 오늘도 5시간 경기를 마치고 다시 배토 가방과 삽을 챙겨서 코스로 나가야 한다.

일곱 번째 일기

음주 후에는 부디 골프 대신 귀가를
밤새 술을 먹고 온 팀을 새벽 첫 팀으로 받았다. 새벽 세 시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출근했는데, 첫팀으로 만난게 만취팀이라니. 다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인사할 때부터 술냄새가 한가득 났다. 술을 저렇게 먹고 골프를 치면 기억이나 날까?

일곱 번째 일기

음주 후에는 부디 골프 대신 귀가를
오늘 나간 팀은 시작부터 카트에 막걸리 다섯 병을 싣더니
18홀 18홀

정규 골프 코스는 총 18개의 홀로 구성되어 있다.
내내 음주 골프를 쳤다. 자기들끼리만 신나서 누가 칠 차례인지도 잊어버리고,
클럽 클럽

골프 클럽 또는 골프채. 골프 클럽은 우드, 아이언, 웨지, 퍼터 등으로 분류된다.
러프 러프

페어웨이의 바깥 부분으로 잔디가 무성하거나 잡초 등이 있는 곳.
에 놓고 다니고, 계속
멀리건 멀리건

티샷이 잘못되었을 때 벌타 없이 다시 칠 수 있는 기회.
치고. 그래서 조심스레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더니 난생처음 듣는 쌍욕을 먹었다.

일곱 번째 일기

음주 후에는 부디 골프 대신 귀가를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황당하고 불쾌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러자 나에게 쌍욕을 갈긴 손놈은 곧바로 골프장에 컴플레인을 걸었고, 나는
벌당 벌당

캐디가 정해진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거나 규칙을 위반했을 때 받는 일종의 징계. 벌당을 받은 캐디는 라운딩에 참여하지 못하고 다른 잡일을 해야 한다.
을 받았다. 물론 급여는 없다. 직원도 분명히 그 손님이 만취한 상태인 걸 알았을 텐데, 그저 내 잘못이라고만 한다. 이곳에서 나는 구성원으로서 보호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럴 거란 게 그려지니 마음 속이 너무 쓰다.

여덟 번째 일기

얼른 먹고 가자 쫌
날도 점점 골프장이 팀을 많이 받고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빠른 경기 진행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캐디들 사이에서 진행 속도가 특히 느리기로 소문난 모 회원님이 오시거나, 땡땡회가 단체로 와서 전반 마치고
그늘집 배토

코스 중간중간에 위치한 휴식 공간으로 음료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에 들르기라도 하면 그날은 망했다고 보면 된다. 그늘집은 진행 관리에 언제나 큰 변수다. 그늘집에서 손님들이 진탕 술 마시고 뭉개고 있으면 나는 아주 속이 터진다. 골프를 치러 온 건지, 술 먹고 내기하러 온건지..

아홉 번째 일기

오늘 새해 첫 라운드를 하다가 내 삶이
보기 보기(Bogey)

기준 타수인 ‘파(Par)’보다 1타수 많은 스코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를 다 읽었다.
알고 봤더니 내 캐비닛이 아니라
선배 캐디님의 캐비닛이더라.
머쓱하게 옆자리에 있는 진짜 내 캐비닛에 짐을 풀고 있는데
선배 캐디님이 일기장과 나를 번갈아보며 눈을 반짝이신다.
나... 캐디생활 잘 할 수 있겠지?

보 기(Bogey)